Facebook하태무ropStedsno3h1tfM925tu6g010aaf8a010gaythu976m4273 agch16c9fh9 ·
대마도 기행 면암 최익현의 수선사
대마도 이즈하라 에는 면암 최익현의 수선사(修善寺)가 있다.
그 중요한 곳을 이번에는 가지 않았다.
왜 안 갔는지 이유는 알 수 없고 좁은 골목 속에 있는 그곳에 많은 한국인이 가면 주민들이 싫어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추측할 뿐이다.
일정표에 없으니 가이드는 일정표대로 움직일 뿐이다.
그러나 한국인이라면 대마도에서 꼭 알아야 할 장소라 지난 노트에서 발췌한다.
면암최익현(1833~1906) 선생은 대한민국의 위대한 유학자요 정치가였다..
정수일교수님과 갔을 때 그의 순국비 앞면에는 ‘대한인 최익현 선생 순국지비’라고 한자로 새겨져 있었다. 이 비는 1986년 8월 3일에 한국 일해재단(日海財團)과 대마도 대표들이 세웠다.
순국비 제막식 때 KBS 취재팀이 대마도의 향토사학자 나카도메 히사에와에게 “항일투사의 순국비를 왜 일본에 세우는가?”라고 질문했다. 나카도메는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세계 어느 나라든 다 같다. 이를 주창하는 것이 곧 무사도(武士道)이다”라고 답했다. 일본에 무사도가 있다면 조선에는 선비정신이 있다.
최익현의 순국과정을 살펴보자.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강탈당했다. 장지연이 쓴 「황성신문」의 사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읽은 백성들은 통곡했다. 홍만식·민영환·조병세가 자결하고 최익현 등 선비들은 잇달아 ‘을사조약은 무효이고 이완용·박제순 등 을사오적을 처벌하라.’고 상소했다. 하지만 고종은 이를 무시했다.
이러자 최익현은 의병투쟁을 계획했다. 그는 전라도를 주목했다. 최익현은 경기도 포천 출신이지만 전라도에도 문인이 여럿 있었다. 그는 문인 고석진의 주선으로 낙안군수를 역임한 임병찬을 만났고, 1906년 5월 29일에 담양군 추월산 용추사에서 기우만 등 호남 유생 50명과 만나 대일항전을 협의했다. 6월 4일에는 전북 태인 무성서원에서 강회(講會)를 열고 거의(擧義)를 호소했다. 이때 80명의 유생들이 자원했다.
최익현은 일본의 기만적 배신행위 16 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하면서 의병모집에 전력을 다해 900여명에 이르렀다. 특히 포수들도 참여했는데, 포수 채상순은 초대 대법원장을 한 김병로와 함께 의병에 가담했다.
이러자 조선 정부와 일제는 즉각 대응태세에 들어갔다. 6월 12일에 순창전투가 일어났다. 교전 상대가 조선군 진위대임을 알게 된 최익현은 ‘동족끼리는 싸울 수 없다’며 의병 해산을 명했다.
6월 14일에 조선군 진위대는 최익현과 ‘12의사(義士)’를 체포해 서울로 압송했다. 8월 14일 일제는 최익현에게 대마도 감금 3년, 임병찬은 대마도 감금 2년을 선고했다. 부산포 초량에 도착한 최익현은 버선바닥에 흙을 깔았고 임병찬에게 물 한 동이를 떠오게 했다. 일본의 흙을 밟지 않고 일본 물을 먹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8월 27일에 대마도 이즈하라 일본군 위수영에 투옥된 최익현은 단식 투쟁해 1907년 양력 1월 1일에 순국했다. 74세였다.
현판에 쓰인 수선(修善)이란 글씨는 친일파 거두의 한 사람 김대식이 썼다는데 그분의 영혼이 벌떡 일어설 것 같은 일을 무슨 심산으로 대쪽같은 면암을 위해 글씨를 썼을까 하는 야릇한 마음이 들었다.
면암 최익현 선생의 마지막 상소
“죽음에 임한 신 최익현은 대마도 경비대 안에서 삼가 서쪽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상소를 올리옵니다.
설사, 저들이 신을 죽이려 하지 않는다 하여도 신은 차마 그들이 주는 것을 먹고 입고 배를 더럽힐 수가 없사옵니다.
그러므로 먹기를 거부함으로써 죽음을 택하기로 하였사옵니다. 신의 나이 74세, 죽은 들 그 무엇이 애석하겠습니까?
바라건데, 국사가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 마시고 군왕의 덕을 분발하시어 믿어서는 아니될 일은 믿지 마시고 더욱 자주의 계획을 굳혀 영원히 의뢰하는 마음을 끊으시고 세상의 형평을 살펴 그 가운데서 할일을 선택하오소서.
애국충절이 엿보이는 면암의 상소문이다.
면암 최익현이 왜국 땅 대마도에서 남긴 유시(遺時)’한편을 소개한다.
기첨북두 배경루(起瞻北斗拜樓)
일어나면 북두를 우러르고 임금 계신 곳에 절하면
백수만삼 분제류(白首蠻衫憤悌流)
흰머리 오랑캐의 옷자락에 분한 눈물 쏟아져 흐른다네
만사불탐 진부귀(萬死不貪秦富貴)
만번을 죽는다 해도 부귀는 탐하지 않으리
일생장독 로춘추(一生長讀魯春秋)
평생을 읽는 글이 노나라의 춘추라네
Shimizu Qianzhi면암 최익현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가슴이 뭉클해지네요. 위대한 조상의 정신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겠어요! 근데, 그런 메세지 남기신 분의 글씨를 본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ㅎㅎㅎ 대마도도 가보고 싶어요! ^^
18wReply
하태무rneoosSdptci70u3f0ith3aA120h0lic7g79f1hpa mhu3rhm09l9202c2gc ·
대마도기행3 나카라이 토스이 생가 문학관
만관교를 지나면 상대마도를 건너 꼬불꼬불 산을 지나 하대마도인 이즈하라로 간다. 제법 긴 거리다.
드문드문 민가도 관공서도 보였지만 사람은 잘 보이지 않고 …
See more
대마도 이즈하라 에는 면암 최익현의 수선사(修善寺)가 있다.
그 중요한 곳을 이번에는 가지 않았다.
왜 안 갔는지 이유는 알 수 없고 좁은 골목 속에 있는 그곳에 많은 한국인이 가면 주민들이 싫어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추측할 뿐이다.
일정표에
없으니 가이드는 일정표대로 움직일 뿐이다.
그러나 한국인이라면 대마도에서 꼭 알아야 할 장소라 지난 노트에서 발췌한다.
면암최익현(1833~1906) 선생은 대한민국의 위대한 유학자요 정치가였다..
정수일교수님과 갔을 때 그의 순국비 앞면에는 ‘대한인 최익현 선생 순국지비’라고 한자로 새겨져 있었다. 이 비는 1986년 8월 3일에 한국 일해재단(日海財團)과 대마도 대표들이 세웠다.
순국비 제막식 때 KBS 취재팀이 대마도의 향토사학자 나카도메 히사에와에게 “항일투사의 순국비를 왜 일본에 세우는가?”라고 질문했다. 나카도메는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세계 어느 나라든 다 같다. 이를 주창하는 것이 곧 무사도(武士道)이다”라고 답했다. 일본에 무사도가 있다면 조선에는 선비정신이 있다.
최익현의 순국과정을 살펴보자.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강탈당했다. 장지연이 쓴 「황성신문」의 사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읽은 백성들은 통곡했다. 홍만식·민영환·조병세가 자결하고 최익현 등 선비들은 잇달아 ‘을사조약은 무효이고 이완용·박제순 등 을사오적을 처벌하라.’고 상소했다. 하지만 고종은 이를 무시했다.
이러자 최익현은 의병투쟁을 계획했다. 그는 전라도를 주목했다. 최익현은 경기도 포천 출신이지만 전라도에도 문인이 여럿 있었다. 그는 문인 고석진의 주선으로 낙안군수를 역임한 임병찬을 만났고, 1906년 5월 29일에 담양군 추월산 용추사에서 기우만 등 호남 유생 50명과 만나 대일항전을 협의했다. 6월 4일에는 전북 태인 무성서원에서 강회(講會)를 열고 거의(擧義)를 호소했다. 이때 80명의 유생들이 자원했다.
최익현은 일본의 기만적 배신행위 16 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하면서 의병모집에 전력을 다해 900여명에 이르렀다. 특히 포수들도 참여했는데, 포수 채상순은 초대 대법원장을 한 김병로와 함께 의병에 가담했다.
이러자 조선 정부와 일제는 즉각 대응태세에 들어갔다. 6월 12일에 순창전투가 일어났다. 교전 상대가 조선군 진위대임을 알게 된 최익현은 ‘동족끼리는 싸울 수 없다’며 의병 해산을 명했다.
6월 14일에 조선군 진위대는 최익현과 ‘12의사(義士)’를 체포해 서울로 압송했다. 8월 14일 일제는 최익현에게 대마도 감금 3년, 임병찬은 대마도 감금 2년을 선고했다. 부산포 초량에 도착한 최익현은 버선바닥에 흙을 깔았고 임병찬에게 물 한 동이를 떠오게 했다. 일본의 흙을 밟지 않고 일본 물을 먹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8월 27일에 대마도 이즈하라 일본군 위수영에 투옥된 최익현은 단식 투쟁해 1907년 양력 1월 1일에 순국했다. 74세였다.
현판에 쓰인 수선(修善)이란 글씨는 친일파 거두의 한 사람 김대식이 썼다는데 그분의 영혼이 벌떡 일어설 것 같은 일을 무슨 심산으로 대쪽같은 면암을 위해 글씨를 썼을까 하는 야릇한 마음이 들었다.
“죽음에 임한 신 최익현은 대마도 경비대 안에서 삼가 서쪽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상소를 올리옵니다.
설사, 저들이 신을 죽이려 하지 않는다 하여도 신은 차마 그들이 주는 것을 먹고 입고 배를 더럽힐 수가 없사옵니다.
그러므로 먹기를 거부함으로써 죽음을 택하기로 하였사옵니다. 신의 나이 74세, 죽은 들 그 무엇이 애석하겠습니까?
바라건데, 국사가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 마시고 군왕의 덕을 분발하시어 믿어서는 아니될 일은 믿지 마시고 더욱 자주의 계획을 굳혀 영원히 의뢰하는 마음을 끊으시고 세상의 형평을 살펴 그 가운데서 할일을 선택하오소서.
면암 최익현이 왜국 땅 대마도에서 남긴 유시(遺時)’한편을 소개한다.
기첨북두 배경루(起瞻北斗拜樓)
일어나면 북두를 우러르고 임금 계신 곳에 절하면
백수만삼 분제류(白首蠻衫憤悌流)
흰머리 오랑캐의 옷자락에 분한 눈물 쏟아져 흐른다네
만사불탐 진부귀(萬死不貪秦富貴)
만번을 죽는다 해도 부귀는 탐하지 않으리
일생장독 로춘추(一生長讀魯春秋)
평생을 읽는 글이 노나라의 춘추라네
Shimizu Qianzhi면암 최익현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가슴이 뭉클해지네요. 위대한 조상의 정신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겠어요! 근데, 그런 메세지 남기신 분의 글씨를 본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ㅎㅎㅎ 대마도도 가보고 싶어요! ^^
만관교를 지나면 상대마도를 건너 꼬불꼬불 산을 지나 하대마도인 이즈하라로 간다. 제법 긴 거리다.
드문드문 민가도 관공서도 보였지만 사람은 잘 보이지 않고
어쩌다
배기량660 이하라는 노란 번호판의 작은 차들만 띄엉띄엄 달리는 산길을 지나 이즈하라 인구 1만 6천이 산다는 대마도의 대도시에 왔다.
우리국민에게는 아니 글쟁이에게는 관심이 많은 사람의 문학관을 본단다.
가이드는 아주 꼼꼼하게 설명을 한다.
그도 그를 것이 말쟁이 들에게도 아주 흥미로운 이아기였기 때문.
한국의 춘향전을 일본에 알린 대 작가가 그의 제자와 나눈 사랑 이야기.
거기다 요절한 제자가 남긴 애절한 일기가 더욱 유명하여 일본 돈 오만엔의 주인공이 된 스토리.
흥미롭지 않은가
나카라이 토스이
생가 기념관(半井桃水館)은 이즈하라 나카무라 584 번지 깊숙이 있었다.
이 기념관은 무사들이 살았던 나카무라지구의 주택가에 자리하고 있는데 귀를 잘 맞춰 쌓아올린 돌담길이 매우 인상적이다.
토스이는 1860년 12월 2일 나카라이 탄시로의 장남으로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의사집안인데 대대로 대마도 태수를 섬기고 있었다. 그는 부산 왜관에서 근무하던 아버지와 함께 어린 시절을 부산에서 보냈다.
이 때 부터 우리말을 배우며 조선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조선에 대한 애정과 정보를 활용하여 유능한 기자로 인정받게 되는데, 특히 우리 춘향전을 일본에 소개하여 일약 한국문학에 정통한 인기 작가로 성장하게 된다.
아버지의 왜관 근무가 끝난 1875년 대마도로 돌아가 16세에 동경의 영문학학원 공립학사에서 공부하였다. 그가 입학하던 해에 강화도에서 일본 군함‘운양호 포격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은 운양호가 단순한 해수 측량이라 속이고 불법으로 영종도를 돌아 강화도 초지진에 접근하여 일부 일본병사가 보트를 타고 칩입하자 조선 수비병이 정당방위의 경고성 총격을 가하면서 촉발되었다.
이때 강화 초지진은 군함 운양호의 포격으로 전파되었고 영종도는 상륙한 일본병사에 의해 35명이 참사 당하였다. 일본은 2명의 경상자가 발생했을 뿐이었다. 운양호는 110 mm와 40 인치의 함재포를 탑재하고 있었고 우리는 사거리가 700m 정도인 구경 2인치 대완구포를 배치하고 있었으니 대적이 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이 사건은 일본의 한반도 침략의 신호탄이 되고 말았다. 이에 대하여 일본인들은 한국 포대가 먼저 발포하였다고 난리를 치고 있었는데 의외로 유력한 신문 중의 하나인 도쿄니치니치(東京日日)」는 보도의 중립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이 때 학생이었던 토스이도 이 신문에 일본 군함의 무력행사를 반대하는 글을 보내 게재된다.
1882년 다시 아버지의 조수로 부산으로 건너온 그는 아사히신문의 계약직 촉탁으로 부산 특파원이 된다. 그해 별기군과 차별대우를 받던 조선의 구식군대가 6월 9일 임오군란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 사건을 생동감 있게 취재 보도하여 1884년부터 정식 기자가 되었다. 이 때 소설도 쓰기 시작하여 1885년에는 소설 ‘오시츤보’를 발표하였다.
22세 때는 춘향전을 20회에 걸쳐 연재하여 일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다. 그가 근무하던 1887년까지 5년간의 열정적인 기자활동으로 인하여 아사히신문은 판매부수가 급상승하게 되고 따라서 토스이의 명성도 높아졌다. 이후 그는 다방면에 걸쳐 유려한 필체를 선보이며 독자들의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20 세의 소설 지망생 히구치 이치요는 1891년 4월 5일 토스이를 찾는다. 그 때 토스이는 도쿄 아사히신문에 「코사후쿠카제」를 연재하고 있었으며 그의 나이 32 세였다. 이들의 운명적인 만남과 사랑은 겨우 5 년 만에 이치요가 요절하면서 조용히 소멸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오직 도스이만을 연모하던 그녀의 애절한 일기가 공개되었을 때 일본 독자들은 그들의 사랑에 다하여 가슴 아파하였다. 이치요의 단아한 모습은 현재 일본 5000엔 지폐에 담겨 있어, 일본인들은 토스이와 이치요의 애절했던 사랑 이야기를 늘 지갑 속에 넣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청일전쟁 이후 조선에 대한 일본 여론이 나빠지고 있었다. 그러나 토스이는 조선에 대해 가치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고 1895년에 연재된「속 호사부바람일본에서는」일본·조선·중국·만주의 정치적·문화적 독립과 원만한 동맹관계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조선침략이 본격화 되면서 그의 말은 빛을 잃게 되었고 아사히의 조선통 기자의 명성과 더불어 일본 문단에서의 그의 인기도 퇴색되고 말았다. 한국문학을 사랑했던 나카라이 토스이는 1926년 11월 21일 향년 67 세로 사망하여 현재 도쿄 분쿄구 고머고메에 영면하고 있다.
그 집의 계단, 그 집의 물을 펐던 고물 펌프.물 확. 그 집의 도서실. 옛날집 모형..
꽃밭의 보랏빛 붓꽃.
친구들을 세워놓고도 사진을 찍었다.
제발. 이 스토리에 집중을 좀 해!
친구들아.
멋있는 일본 작가잖아.
나는 한국으로 가면 그의 책을 구해 읽어볼 작정이란 말이야.
그 돌담의 골목길은 정말 예쁘게 잘도 꾸며 우리들은 늙음도 잊고 소녀처럼 꽃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지.
하태무 shared a memory.
rneoosSdptci70u3f0ith3aA120h0lic7g79f1hpa mhu3rhm07l9202c2gc ·
작년 이맘 때 좀 바빴네. 언제는 아니었나?나는 지긍도 바쁘게 산다. 그제 어제 오늘은 녹음 성당. 마치고 모임.그리고 손님 이 쓴 침구류 타월 등등의 빨래 대형세탁기 7통을 돌리고 널고 말리고 밤 이 늦었다. 그러고도 생지옥을 살 오월 연휴를 천당을 향해 기쁘게 달리듯 맞아야 한다.나는 긍정적인 사람으로 살기로 했으니까..
만제키바시(萬關橋)를 정리해본다.
정수일 교수님과의 길거리 강의 노트에서 전제한다.
이
다리는 일본이 자랑하는 러일전쟁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던
"쓰시마해전"의 대승을 가져다 준 아주 의미있는 다리이다.
만제키 다리는 대마도에 건설된 인공적인 운하 위에 설치한 다리로서
원래 하나의 섬이였던 대마도를 이 운하의 개통으로 상 대마도 하 대마도로 나누고 있다.
1904년 완공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총 3회에 걸쳐 보수공사를 하였다.
지금의 다리는 처음 보다 약 10M정도 이동된 자리이며 주민들이 배를 운항할 때 섬을 한바퀴 돌아가는 불편을 없애고 군함의 출입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만든 다리이다.
수심 4.5~5.1m, 폭 40~65m, 길이 210m
이 다리에 얽힌 역사적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부국강병정책으로 해군력 증가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대륙으로 연결되는 한반도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일본본토와 부산까지에 이르는 항로의 단축이 필수적이었다. 그 일환으로 일본해군의 주도하에 섬의 가장 좁은 부분을 뚫어 운하를 개통하게 된다.
대마도의 허리를 관통하는 인공해협 만제키 운하건설을 하게 되니 이운하가 쓰시마 해협과 아소만을 지나 대한해협에 이르는 직항로가 된 것이다.
그 당시 일본은 영일 동맹을 맺고 영국군에게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라 부탁했다.
그리고 1904년 2월 6일 당시 러시아에게 10일에 전쟁을 시작하자는 선전포고를 한 후 이틀 앞날 8일에 기습적으로 러시아를 공격하여 러일 전쟁을 시작했다.
당시 러시아는 일본 따위는 가볍게 여길 만큼 군사력이 막강했는데 1905년 3월 만주 봉천에서 러시아의 주력군이 패하는 일이 벌어졌다.
러시아는 전력의 보충을 위하여 유럽에 있던 발틱 함대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을 시킨다. 러시아함대는 북해에서 지중해 스에즈 운하를 통과하여 인도양을 거쳐 대한해협으로 이동하려고 했는데 일본이 영국을 시켜 러시아 함대를 계속막아 스에즈 운하를 이용하지 못하게 하자 러시아 함대는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와야 했고, 긴 항해로 지치고 전의를 잃은 러시아 발틱 함대는 쓰시마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본 함대에게 정면 측면의 협공을 받아 괴멸되고 만다.
그 동안 일본 해군 제독 도고헤이 하찌로 제독은 "황국의 흥망이 이 일전에 달렸다."고 외치면서 날마다 일본 해군에게 정신무장을 시켰다한다.
이 전쟁의 기록을 보면 얼마나 일본의 일방적인 전투였는지 짐작이 간다. 러시아측 전함 38척 중 35척 격침, 3척 나포 48000명 전사.
일본측 전함3척 침몰 117명 전사.
이 쓰시마 해전의 결과 일본은 동북아에서 주도권을 쥐게 되고 러시아는 짜르 왕조의 몰락과 함께 볼세비키 공산혁명의 시발점이 된다.
그리고 일본의 야욕은 정점에 달하면서 미국으로부터 대한제국을 지배해도 좋다는 가쓰라-테프트협정(1905년)통해 한국의 주권을 박탈하는 음모의 이빨을 갈기 시작한 것이다.
그후 5년(1910년) 드디어 대한제국은 강제로 치욕적인 합병을 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대륙으로 나간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치르기에 이른다
일본의 자랑인 이 다리는 우리에겐 슬픔의 다리라 할 수 있겠다.
가이드는 차에서 설명하기를
*에보시타케 전망대나 맑은 날에는 한국이 보이는 대마도 최북단에 자리한 한국 전망대, 등등을 못간다고 한다.최고의 전망대를 못가니 꿩대신 닭인 만제키바시 전망대를 보는 것이라고.
그 꽃 하나 심겨지지 않은 전망대 위에서 늪인지 강인지 바다인지도 가늠이 안되는 리아스식 바다와 만관교 근처의 집들과 멀리 조금만 빼꼼히 보이는 다리를 보다가 전망대를 내려왔다.
노랑풍선에서 1박 2일로 대마도를 간다고 홈쇼핑상품을 내놓았다.
매달 만나는 친한 친구들이 제발 봄나들이를 함께 가보자고 했다.
정말 일정이 빡빡했고 연일 피로가 겹치는 날들의 연속이었지만 1박이니.…
See more
댓글 없음:
댓글 쓰기